法古創新, 법고창신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는 뜻으로, 옛것에 토대(土臺)를 두되 그것을 변화(變化)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根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
내 생각에 이 말은 좀 재정의되야 할 듯 싶다. 옛것에 토대를 둔다는 말의 뉘앙스를 뜯어 고쳐야 한다. 여기서 옛것이란 기존에 존재하던 데이터, 문제풀이방식을 말한다. 간단한 예는 질병과 치유를 들면 되겠다. 병에 걸린 사람은 기존에 존재하는 풀이방식에 의존한다. 그러니 이미 잘 정리된 의학 영역의 데이터를 참조하여 (약을 처방하여) 해결하는 식이다.
결국 옛것, 또는 토대가 되는 그것은 반복되는 것으로서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설령 해결책이 안되더라도 가능성은 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변화시킨다는 말은 오늘날 창의력이라고 말하는 것과 관련된다. 계속해서 개선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법고창신에는 2가지 키워드가 있는 듯 하다.
- 보수성
- 발전성
보수성은 이렇다. 옛것은 지켜야 한다는 뉘앙스다. 여기서 ‘근본’과 옛것에 ‘토대’를 둬야한다는 말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 뉘앙스를 뜯어 고쳐야 한다. 마치 옛것에 토대를 둬야하니, 옛것을 흠집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경우에 따라선 옛것 자체를 뒤짚어버려야 더 잘 풀리는 경우도 있을 듯 하니 말이다. 또한 옛것이라는 게 뭔지, (정확히 어떻게 나왔는지, 옛것을 소급하면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지) 등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차라리 이는 ‘원리’라고 바꿔서 부르는 게 나을 것이다. 즉, 옛것이라는 것은 일종의 기원이자, 원리로서, 가장 근본적인 것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는 추상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즉 ‘관계적 지식’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약의 원리는 생체의 호르몬 및 기관들을 의도적으로 조절하게 하여, 원하는 결과를 유도해내는 것일 것이다. 즉, 이 원리에 토대를 두되, 이것을 개선하고 변화시키고, 나아가 더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이러한 정신인 것이다. 애플사와 다를 게 없다. ‘근본’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발전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어떤 역사성과 권위에 토대를 두는 것이라면, 그것은 통치술로 전락한다.
어떤 것에 토대를 두느냐? 역사성과 권위에 토대를 두는가? 아니면 근본 원리에 토대를 두는가?
후자가 더 과학적이고, 발전에 기여하며, 자유로운 것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전자는 쓸데없는 인간관계 및 역사/권위라는 대전제의 강요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입력받은 만큼 출력하게 된다.
당신이 오늘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기억속에 잘 저장시켜 둬야 한다. 당신의 기억은 과거를 회상하며, 과거에 젖고, 과거라는 영화를 보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잘 저장해놨다가, 유사한 새로운 상황을 보면, 문제풀이의 단서로서 쓰라고 주어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더욱 발전적이다)
당신은 어렸을 때, 알게 모르게 타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교육과 훈육과 자발적 입센션을 거쳤을 것이다. 교육과 훈육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을것이니, 자발적 인셉션이 뭔지 살펴보자. 이는 쉽다. 연애를 생각해보자. 어린아이가 연애하는 방식을 보자. 그 아이는 맘에 드는 여자 아이를 보면서 애정을 느끼고, 사귀고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마치 수많은 군중 속에서, 자기 가족을 알아보듯이, 수많은 경쟁자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몇 명만 포착되게 된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그 아이는 여자아이에게 선택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때, 그 남자아이는 번민에 사로잡히게 된다. 인간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박탈감과 열등감은 강렬하다. 그 아이는 스스로 물음을 던진다. “왜 문제지? 왜 난 안되지? 왜 쟤는 저런 남자를 좋아하지? 쟤가 왜 날 거부하지?” 그러면서, 스스로 자신의 가설에 입각해서, 자신의 성격을 만들어간다. 이 때 그 아이의 가설을 구축할 때 쓰여지는 것이, 그 아이가 접해왔던 모든 데이터들이다. 그런데 아이는 데이터의 발생과정, 실증적 성과, 타 지식과의 유기적 관계, 등등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대개 합리화를 시도하고, 무지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 아이는 아는만큼만 선택하게 된다. (오류라 하더라도)
그 결과, 그 아이는 남들이 보면 이상한데, 자기는 맞다고 믿고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셈이다. (그게 아니면 아이는 겁에 지려서 아무런 행동도 안한다)
이 아이의 사례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하다. 기억은 과거를 여행하는 장치로도 볼 수 있으나, 원리로만 본다면 저장된 데이터에 가깝다. 그리고 이 데이터를 사용하는 방법은 원리에 토대를 두되 그 때 그 때에 맞게 변형시켜 적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마주친 상황이 그 데이터를 저장시킨 맥락 그대로일 경우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년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와 굉장히 다를 수 있다. 그래서 그 때 배웠던 여자에 대한 깨달음이 도움이 안될 수 있다. 가령 A형 여자친구를 사귀어서 익숙해있다가 갑자기 B형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다고 해보자. (혈액형을 성격의 유형으로 보라.) 이 때 과거에 A형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배웠던 지식은, 그 자체로 B형 여자친구에게 통하기 어렵다. 그래서 지식의 무용지물을 느끼게 될지 모르나, 이것은 맥락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곧이 곧대로 통하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타이밍/환경)
다시 앞 부분의 예를 보자. 사람들은 대개 병이나면 병원을 간다. 왜 그러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거기에 저장된 데이터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문직이란 그렇게 각종 데이터를 비축해둔 영역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우리는 직접 의학사전을 들춰볼 필요 없이, 그들에게 의탁하여 문제해결책을 전달받는다. 그 결과로서 물질이 ‘약’인 셈이다. 그리고 전문직은 그러한 데이터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하여 원리에 기초하여 때에 따라 약의 성분을 조절한다거나, 약을 처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맥락의 특성을 알기에, 지속적으로 약을 개발시킨다거나, A환자에게 썼던 처방전 그대로를 B환자에게 쓰지는 않는 등의 유연성도 보인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병원에 가지 않고 스스로 처방을 한다면, 이러한 맥락에 대해서는 놓칠 확률이 크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전문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원리는 누구나 조금만 알아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맥락간의 고려는 원리에 기초한 응용이 되므로 몇번의 케이스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전문기관의 존재이유가 될 것이다.
이는 당신에게 시사점을 준다. 당신은 오늘 무슨 책을 읽었는가? 순자? 맹자? 당신은 그 책을 읽고, 맹자가 이랬다더라, 로 마쳐서는 안된다. 그건 의미가 없다. 기껏해봐야 맹자를 복제했는가 아닌가만 평가할 수 있을 뿐이다. (그 평가에서 고득점을 받으면 당신의 존재가치가 높아지는가?)
당신이 역사성/권위를 주장하는 것에는, 나르시즘의 원리가 들어있다. 나 이만큼 안다, 나만큼 잘난 사람 있나, 니네들은 이거 아냐?
허접한 논리다. 몰라도 살 수 있고 몰라도 지장없다. 알면 아는 거지, 그게 인간으로서 성장을 의미하진 않는다. 물론 그렇다해도 현대사회에서 계급에서의 승진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스템화 되어있으니까)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원전 해설자들은 별도로 친다. 그들의 작업은 지금의 나르시즘과는 무관할 것이니)
당신이 맹자를 읽었다면, 그 맹자의 아이디어와 원리가 적절한지의 여부를 먼저 따지고, 그 다음 맹자의 아이디어는 현재 시대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조화가 되는지, 어울릴 여지가 있는지, 그런 것들을 살펴야 한다. 때에 따라서 당신은 맹자를 붕괴하고, 맹자에게서 얻은 몇몇가지 요소들만 뽑아온 다음, 새로운 토대를 구축할 수도 있어야 한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주어진 시대에 대한, 당신만의 문제풀이 방식이다. 문제해결이다. 접근방법 및 접근관점이다. 과거의 책을 읽고 품평하는 것은 쉽다. 누가 못하는가. 기간 잡고 읽어대면 된다. 하지만, 그 책에서 얻은 것을 바탕으로, 지금 시대를 해석하고 분석하고 풀이하는 문제는 그 이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골치가 아프다. 왜냐하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법고창신의 자세로 임해야 하는 것이다.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 헌데 어떤 경우에는 원리 자체가 충돌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가령 성선설 성악설이 그러할 것이다. 그럴 때는 단순하다. 더 추상적으로 올라가서, 고리를 잡아 낸 다음, 실마리를 잡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선설/성악설은 인간이 천부적으로 뭣하다는 얘기인데 거기서 시작하여,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됨으로써 이 문제는 단순해진다. 결국 해석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존재의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이미 성선/성악이라는 분류로 인해 분류가 된다는 것만 파악되기 때문이다(추상적으로 올라감으로써 이미 문제 틀이 다르게 전환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근본 전제, 근본 원리에 대한 설정 자체에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것이 원리에 토대를 둔 사고법의 특징이다(어떤 경우에는 원리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럴 때 혁명이 일어난다).
하지만 법고창신은 2가지로 볼 수 있다. 권위에 두느냐, 원리에 두느냐. 권위는 그저 환원주의에 불과하다. 어떻게든 권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앞서 주어진 것을 권위에 맞게 변형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원리에 토대를 두면, 당신의 아이디어가 변할 수도 있다. 그리 하여, 어쩌면 아예 새로운 틀마저 형성될 수 있다.
…
글에 담긴 작성자의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이 작성자를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는가?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소리다. 보통 좆중고딩이나 직장인들 (어설픈 프레젠테이션 책을 읽은)의 특징은 ‘주장과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한 논증형 글쓰기를 으뜸으로 알고 배운다. 하지만 내가 볼 땐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더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어떤 주장과 근거를 나열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건 다음의 질문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었나?” 이것이 골자다. 이것만 파악해도 한 사람의 생각과 언어에 대한 여러가지 문제점들은 소용돌이 치는 돌아서 한 곳으로 모인다.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 독해를 한다는 것은, 언어를 읽는다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를 읽어낸다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내는 게 독해다. 여기에 쓰인 글들은 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도돌이쳤던 음표들이라고 보면 된다.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음의 아름다움에 빠지면 표현에 집착한 것이다. 하지만 그로인해 베토벤의 표정을 추측했다면, 그는 진일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