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Updated: 2026.07.05. 17:50

Last Updated: 2026.07.05. 17:50


욥기로부터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기독교는 욥기의 가르침으로부터 후퇴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서 찾아오는 불운은 어떠한 인과에 의한 결과라기보다는 ‘그냥’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욥기의 가르침은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이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왜 정의는 구현되지 않는가?”, “이 세상에 정의가 없다면 신을 왜, 그리고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욥기는 선에서 번영으로 이어지는 인과와 악에서 형벌로 이어지는 인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권선징악 또는 인과응보의 개념은 인간이 발명한 것일 뿐, 그리고 그것을 온 세상에 외삽시킨 것일 뿐, 애초에 세상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장소이다. 심지어 그런 일들은 신의 원대한 계획 하에 일어나지 않는다. 신은 우리 개개인을 성장시키기 위해 우리를 직접 단련시키는 그런 친절한 존재가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욥기는 믿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더 정확히는 거짓 신앙보다는 정직한 무신앙이 더 낫다고 말한다. 단순한 믿음보다 삶의 태도가 훨씬 중요하다. 욥기 13장 7절은 말한다.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 그를 위하여 궤휼을 말하려느냐?

신앙에는 어떠한 경제적인 이유도 존재하면 안 된다.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진실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신앙을 하며 사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은 인생의 모든 부분이 통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생의 기쁨이든 슬픔이든 모든 것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올바른 삶의 태도는, 오만하게 정의를 부르짖지 않고, 복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선을 행하고, 악으로 벌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악을 행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삶의 변곡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동시에 불의에 굴복하지도 않으며 손쉽게 권선징악의 태도로 빠지지 않는 태도이다. 이는 경외에 의한 신앙이다. 인간의 언어로 절대로 담아지지 않는 이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에 대한 경외이다. 신앙에는 거래 또는 교환도 없다. 또한 욥의 친구들이 했던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안다’라는 오만함도 없다. 동시에, 그 경외하는 창조주에게 직접 항의할 수 있는 신앙이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항의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오히려 창조주가 진심으로 정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항의하는 것이다. 왜 ‘내 기준에 맞지 않냐’고 잘못된 항의를 하는 것이 아니다. 경외란 침묵이나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라 그 앞에서 거짓되지 않는 것이고 올바르게 질문하는 것이다. 신을 감히 ‘이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앙이란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기독교는 이러한 가르침에서 후퇴한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개념을 만들어낸 순간부터, 인간의 얄팍한 만족감을 위한 꿈만 같은 세계를 구축하면서부터 기독교의 체계는 권선징악의 단순한 프레임으로 전락해 버렸다. 내가 보기엔 예수의 대속보다 더 위대한 것이 바로 욥의 깨달음이다. 영화 매그놀리아에서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린 절망의 순간, 개구리비가 내리고 나약한 존재들이 구원을 받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이치와 역설 속에 구원이 존재한다는 깨달음. 인간이란 그 알 수 없는 이치 안에 종속된 존재라는 깨달음. 인간관계란 여러 조건(conditions) 위에서만 조건지어진다는(grounded by) 깨달음. 결국 인간은 그정도의 존재라는 깨달음. 그렇기에 우리는 과도하게 삶의 조건 하나하나에 목매달 필요는 없다. 에로스적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당연스레 생각할 필요도, 그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라고 생각할 필요도, 타인의 시선에 안절부절할 필요도, 사회적 경제적 성공만을 목표로 치열하게 살 필요도, 눈꼽만큼도 없다. 그럼에도 삶에 염세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도 없다. 그 사이 어딘가의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