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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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프랑스 혁명은 기존의 설명대로 프랑스 내부의 모순이 폭발했기 때문에 발발했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18세기 군사,외교,경제적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유럽국가들의 경쟁이 고조되었으며 이는 전쟁 및 전세계적인 식민지배 및 무역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프랑스가 이 경쟁에서 밀려남에 따라

2장
혁명에 뒤이어 이어진 혁명전쟁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가졌다. 자유,평등,민족,인민 같은 개념들이 기존의 군주정 질서에 전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그러나 혁명전쟁은 이데올로기적 성격만 강조되어선 안 된다. 혁명전쟁은 반드시 당대 국제 정치의 맥락 안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혁명 이전 시대 이해관계로부터 내려오는 연속성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기존 국제질서의 경쟁 구도가 혁명이라는 충격을 계기로 재가동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7세기부터 유럽의 국제질서는 세력균형의 지리적 범위 확대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세력균형은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가 외교-전쟁이라는 수단으로 유럽 국제정치를 좌우하는 형태로 실현되었다. 크게 세력균형 하의 유럽국가들은, 각각의 목적과 역량에 따라 서로 다른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1) 유럽 내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대륙 열강세력(오스트리아, 프로이센), (2) 이해관계가 유럽을 넘어선 식민열강(영국, 프랑스, 러시아), (3) 국제 경쟁을 주도할 수 없는 약소국 세력(폴란드, 신성로마제국 등)이다. 한편 18세기 후반 국제통상은 강대국들의 생명줄이 되었고, 이에 따라 상업, 제해권 및 해군력이 세력균형 경쟁의 핵심 축으로 자리잡았다.
3장
3장은 1차 대불동맹전쟁의 전개를 설명한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한 국가의 역량의 총량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를 한 지역에 집중하게 되면 다른 나머지 지역에 대한 역량의 정도는 당연히 느슨해진다. 이는 프랑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전쟁에 참여한 모든 국가들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프랑스는 서유럽과 이탈리아 북부 및 중유럽 서쪽에 집중했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는 동유럽-폴란드에 특히 집중했다. 영국은 유럽 내부보다는 유럽의 바깥, 즉 해외 식민지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신생국인 미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혁명전쟁 초기, 일련의 전투 패배와 식량난이 닥치자 ‘강하고 중앙집권적 지도력만이 공화국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던’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공포정치가 프랑스에서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프랑스는 국민총동원을 통한 전시국가로 전환되었다. 이후 저자는 1차대불동맹전쟁의 대략적인 경과를 설명한다. 프랑스는 전쟁 이후 라인강 서쪽을 장악했고 네덜란드를 멸망시킨 후 위성 공화국(바타비아 공화국)을 세웠으며(1795) 북이탈리아지방에도 위성 공화국인 치살피나 공화국(1797)과 헬베티아 공화국(1798)을 세웠다. 사르데냐 왕국 역시 사실상 프랑스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의 군사적인 성공은 오직 프랑스만의 요인 때문만은 아니었고, 사실 이전부터 이어지던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의 상호견제, 즉 이 세 국가가 폴란드 분할에 집중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또한 프랑스의 유럽 대륙에서의 성공은 반대로 해외 식민지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력을 약화시켰다. 프랑스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던 생도맹그(Saint-Domingue)에 혁명이 발생했고(아이티혁명) 영국은 서인도제도의 프랑스 및 스페인의 영역을 차지하려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인도양의 프랑스 영향 하에 있는 지역도 영국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네덜란드의 남아프리카 식민지도 차지하였다.
해외 식민지를 둘러싼 프랑스-영국 간 갈등은 미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미국은 중립을 유지하려 했지만 프-영 갈등과 관련된 내부 분열이 누적되었다. 제이 조약과 XYZ사건으로 인해 미국과 프랑스 간 유사전쟁(Quasi-War)이 발발하였고 이는 1800년 모르트퐁텐 조약으로 봉합되었다. 이 조약이 결국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이어지는 길이 된다.
4장
4장은 제해권이 없어 영국을 직접 타격할 수 없었던 프랑스가 대신 영국의 주변부를 공략하기 위해 감행한 시도인 아일랜드 원정과 이집트 원정을 다룬다. 특히 당시 이집트는 영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만일 이집트 원정이 성공했다면 본국과의 연결이 끊긴 인도를 프랑스가 접수할 수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결론적으로 실패했으나, 이는 아일랜드의 독립을 늦춘 것, 그리고 이집트에 근대를 촉발시킨 것,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을 탄생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 원정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맹방인 오스만 제국이, 그의 숙적이었던 러시아 및 영국과 손을 잡게끔 만들었으며 2차 대불동맹이 결성되는 것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국제질서를 바꾸었던 사건이었다(물론 세력균형 하에서 국제관계의 지형만 변화했다). 영국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이후 인도로의 해상 접근 뿐만 아니라 육로 공격에도 맞서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육로 공격에 맞선 방어책에도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한편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의 연이은 패배에 힘입어서, 이집트에서 돌아와 통령 정부를 세워 프랑스를 장악한다.
(아래 “피라미드 전투”는 이 책의 표지로도 사용되었다.)
5장
이제 시선은 중동과 인도로 넘어간다. 19세기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이 펼쳐졌던 지역이다. 저자는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보다 앞선 시기부터 작동했으며 혁명전쟁기에는 영국, 러시아 뿐만 아니라 프랑스까지 포함된 삼각경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 정부와 동인도회사가 유럽의 경쟁국들이 서아시아를 경유해 인도를 위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전쟁의 중심 논리 자체가 인도 방어라는 틀로 재구성된다.
해당시기 인도는 마라타제국, 하이데라바드, 마이소르 등 지역강국과 동인도회사 지배 인도가 공존하던 시기였다. 영국은 18세기 후반 마이소르 전쟁을 거치고 세력을 확장했지만 프랑스의 인도 세력(마라타 제국)에 대한 협조를 통해 프랑스가 영국을 흔들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이런 구조가 가속화된 계기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다. 동인도회사는 프랑스가 이집트로부터 인도로 침투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지정학적 고려를 더 넓은 범위로, 그러니까 인도, 이집트 및 아라비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까지 뻗어나갔다. 프랑스로부터 인도를 방어하기 위해 영국은 페르시아의 내정과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치려 했고, 페르시아는 영국을 활용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했다.
장의 후반부에서는 대외 관계, 특히 전쟁이 프랑스 혁명의 전개를 좌우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대외 위기는 프랑스 국내 정치의 급진화와 쿠데타의 연쇄를 촉발했다. 총재정부는 국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군사 지도자에 의존하게 되나, 이에 의존할수록 더욱 취약해졌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이집트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6장
나폴레옹이 제1통령으로 올라서게 된 이후, 그는 대내적으로 혁명으로 얻은 성과를 후퇴시키기도 했지만, 중앙집권화를 통한 비선출 공무원, 나폴레옹 법전 제정, 프랑스은행 설립, 중등교육 과정 재편 등의 성과 역시 존재한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질서와 안정에 대한 수요에 부응한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와의 강화조약(레뉘빌 조약), 스페인과의 아란후에스 조약, 교황청과의 정교협약 등을 맺으며 나폴레옹은 대외적인 안정에도 힘쓴다. 이는 (전쟁을 일삼던 총재정부를 무너뜨린 나폴레옹이 평화적 공세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나폴레옹의 대외적인 신망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본국에서는 그의 권력을 다질 수 있게 했다.
한편 러시아가 제2차 대불동맹전쟁에서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불신을 키운 상태였다. 이를 놓치지 않고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친프랑스 진영으로 전향시킨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와 러시아의 정책이 결합해 사실상의 대륙봉쇄령이 형성되었으며 이에 영국은 활발한 외교와 노골적인 무력 동원으로 대처했다.